내 통장 잔고 6만원
한국에 들어온 지 한달 반이 지났는데 해외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인지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우연히 재택 근무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다 투잡 커넥트를 알았고, 글쓰기를 좋아해서 나에게 맞는 일거리가 있나 해서 알아보았는데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작업 의뢰는 마감이 되었네요....그냥 이야기를 쓰다가 올려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생김새도 다르고, 각기 살아온 인생 이야기가 다르듯 저도 나름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았는데 조금이나마 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고 싶네요....
내 나이 50, 해외에서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호주, 베트남, 라오스...
지금 돌아보면 남 부럽지 않은 기회와 조건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순간의 희열과 성공, 절망, 슬픔들...
내 인생은 휘황 찬란한 마지막을 장식하며, 남부럽지 않은 조용하고 아늑한 산골에서 요즘 유행하는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사랑하는 댕댕이와 매일 산행을 하며 약초를 채집하고, 운이 좋으면
산삼, 천종삼을 발견하는 횡재를 하며... 하루하루 자연을 만끽하며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산속의 고요함을 즐기며...
그러나 내 현실은 통장 잔고 6만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난한 시골의 홀어머니의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조차 못하는 유복자가 내가 태어나자 마자 얻은 타이틀이다. 어머니는 6남매을 부양하고자 매일 머리에 무거운 문종이(창호지)를 2-3단씩 이고 2-3일 혹은 일주일을 외지로 팔러 다니셨다.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한 어린 나에게는 그런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고, 어머니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시는 날이면 온갖 어리광으로 어머니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심한 말들을 어머니에게 쏟아 내었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였지만 뒤돌아 서면 어린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시지 못하는 본인의 처지를 비관하고 내내 마음아파 하셨으리라...
친할머니가 함께 사셨다. 나는 친할머니의 곰방대 냄새를 좋아했다. 할머니가 해 주시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도, 가끔 어디서 구하셨는지 내 손에 쥐어주는 왕 사탕도...그런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심하게 하시는 잔소리도, 시집살이도...
나는 그런 할머니가 항상, 제일 좋았다. 3년 넘게 치매로 어머니에게 온갖 똥, 오줌 수발을 하게 하시던 할머니가 임종전에 잠깐 정신이 돌아와 어머니에게 "미안하다, 고생했다"라는 말을 하셨을때도 나는 왜 어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린시절 어머니에 대한 나의 미움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 겠지만, 나는 어렸을때부터 공부를 곧잘했다. 초등학교를 남들은 8살에, 혹은 조금 일찍 7살에 들어가지만, 나는 6살에 입학을 했다. 동네에는 내 또래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다들 나보다 한두살이 많은 형, 누나들이 대부분이어서, 매일 아침 책가방을 메고 등교를 하는 그들을 볼때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내 안에 있는 등교를 향한 열정들이 끌어 올랐고, 매일 같이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 학교 교무실 앞에서 때를 쓰기 시작 했다. 매일 같이 큰소리로 학교 보내달라고 울며 보채기를 시작했고, 이 일로 어머니는 매일 학교에 불려 다니기 시작하셨다. 초등학생도 아닌 나를 위해 매일 학교에 불려 다니시는 어머니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어느날은 그런 나를 막기위해 신발을 감추시기도 하셨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맨발로 학교를 찾아가서 울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하늘도 감동하셨는지, 아니면 교정이 떠나가라 울부짖는 나의 소리에 두손 두발을 들었는지, 학기가 막 시작될 때쯤 특별 입학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그렇게 나는 6살에 초등학교 1학년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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